천년의 돌 사원을 건너 족자카르타의 밤을 맛보다
도시만 정하고 무작정 비행기에 올라 숙소를 잡는 것이 나의 여행 방식이다. 첫날은 숙소 주변을 가볍게 산책하고, 밤에 침대에 누워 다음 날 가볼 만한 곳을 찾아보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Yogyakarta) 여행은 계획이 없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침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수백 년 혹은 천년의 시간을 버텨온 거대한 돌 사원들을 탐방하고 현지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음식을 찾아 나섰던 긴 하루의 기록이다.
웅장한 세계 최대의 불교 유적, 보로부두르 사원
아침 8시 40분, 오늘 이동해야 할 거리가 제법 멀었기에 그랩 프리미엄을 불러 조금 사치를 부려보기로 했다. 배차되어 온 차는 깔끔한 회색 BYD 전기차였는데, 새 차라 그런지 내부가 아주 쾌적하고 조용했다. 족자카르타 시내의 정체된 도로를 뚫고 한 시간 반가량을 달렸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마겔랑(Magelang) 지역에 위치한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이다. 보로부두르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상부 관람 인원을 제한하고 있어서 전날 미리 상부 탑승 가능한 티켓을 구매해 두었었다. 인원 제한 티켓을 미리 준비한 덕분에 현장에서 바로 실물 티켓을 교환받고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입장 후에는 넓은 부지를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전동 카트에 올라탔다.


사원 진입로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사원 보호용 짚 신발인 '우파나트(Upanat)'를 나누어 주었다. 거친 석조 계단과 바닥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남들이 신던 것을 돌려쓰는 줄 알고 무좀이라도 옮는 게 아닐까 신고 다니는 내내 찝찝했는데, 관람을 마치고 알게 된 사실은 반납하는 것이 아니라 기념품으로 가져가는 새 신발이라는 점이었다. 사원 전역은 전문 가이드의 동행하에 단체 관람 방식으로 진행된다. 가이드가 깃발을 들고 그룹을 끌며 유적의 역사와 구조를 설명해 준다.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보로부두르 사원은 실로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8~9세기 샤일렌드라 왕조 시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원은 단일 불교 유적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약 2백만 개가 넘는 안산암 블록을 시멘트 같은 접착제 없이 오직 돌과 돌을 서로 맞물려 쌓아 올렸다. 거대한 입체 불교 대만다라(Mandala) 형상을 띠고 있으며, 욕계·색계·무색계라는 불교의 세계관을 기단부부터 상부까지 단계적으로 구현해 놓은 건축적 기적이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사원 내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사원 기단과 회랑을 따라 수많은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유독 머리가 없는 머리 부분 파손 불상이 많았다. 불상의 목 부분이 구조적으로 약하기도 하고, 화산 폭발이나 지진 같은 자연재해와 과거 도굴꾼들의 도굴 과정에서 머리가 잘려 나갔다고 한다. 벽면을 메운 섬세한 부조(Relief)들은 석가모니의 생애와 본생경 이야기를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는데, 의미는 정확히 몰라도 수천 년 전 사람들이 돌 하나하나에 새겨 넣은 정성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사원의 최상층부에 도달했다. 이곳은 깨달음의 세계인 무색계(Arupadhatu)를 상징하는 원형 테라스로, 종 모양의 구멍 뚫린 종형 스투파(Stupa)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각 스투파 내부에는 좌선하는 불상이 모셔져 있다. 정상에서 둘러보는 주변 산세와 종 모양 스투파들의 조화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깊은 정적을 안겨주었다.

사원 관람을 마치고 나면 원하는 사람은 더 둘러보거나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간다. 출구로 이어지는 길은 숲처럼 울창하고 깔끔하게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대략 1km 정도 되는 다소 긴 코스였지만 푸른 나무와 깔끔한 보도블록 덕분에 지루함 없이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힌두교의 기적, 프람바난 사원
보로부두르 관람을 마치고 차를 타고 곧바로 족자카르타 동쪽의 프람바난(Prambanan) 사원으로 이동했다. 차로 약 2시간 가까이 걸리는 장거리였다. 나를 기다리던 택시 기사가 중간에 먼저 점심 식사를 해버리는 바람에, 정작 나는 편의점에서 빵 한 조각을 사서 요기하고 사원에 도착해야 했다. 배가 몹시 고팠다.

처음에는 배도 고프고 피곤해서 대충 빠르게 사진만 몇 장 찍고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원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그 압도적인 풍채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9세기 산자야 왕조 시대에 건립된 프람바난은 인도네시아 최대의 힌두교 사원 단지다. 힌두교 삼대신인 시바(Shiva), 비슈누(Vishnu), 브라흐마(Brahma)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으며, 하늘로 솟구친 날카롭고 뾰족한 고딕풍의 수직 석조 구조가 전형적인 힌두 건축 특성을 잘 보여준다.


가장 중심에 위치한 47m 높이의 시바 사원 내부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어두컴컴한 감실 중앙에는 연화대 위에 서 있는 거대한 시바 마하데바(Shiva Mahadeva) 석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세한 조명 빛 아래 드리워진 신상의 신비로운 음영이 고요한 중압감을 선사했다. 프람바난 사원은 가까이서 보는 디테일도 훌륭하지만,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단지 전체의 실루엣을 조망할 때 그 웅장함이 극에 달한다.

넓은 잔디밭 너머로 사원 전체를 둘러보며 수많은 지진을 견뎌내고 재건된 이 위대한 유산의 역사를 가만히 짚어보았다. 과거 16세기 대지진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던 돌더미들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하나씩 다시 조립해 올렸다고 하니 현지인들의 자부심이 이해가 갔다.

프람바난 역시 퇴장로가 꽤 길게 이어져 있었다. 나가는 길목 한편에는 자그마한 미니 동물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사슴들이 철망 너머로 방문객을 반기고 있었다. 관람객들이 사원 구경을 마치고 나가는 길까지 아기자기하게 신경 쓴 배려가 느껴졌다.

달콤하고 짭조름한 족자카르타의 맛, 구덕과 사태
오후 3시 20분, 다시 차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하루 동안 불교와 힌두교를 대표하는 두 거대 유적지를 모두 정복했으니 나름대로 꽤나 고되고 빡빡한 여정이었다. 속은 텅 비어 있었고 기운이 사르르 빠져나갔다. 계획 없이 도시만 정해서 오고 숙소에서 다음 날 일정을 찾는 자유로운 디지털 노마드의 삶이라지만, 요즘은 계획이 없는 것 치고 너무 과하게 돌아다니며 체력을 쏟아붓고 있다. 내일은 카페에 진치고 앉아 달달한 음료나 마시며 본업인 일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숙소에서 잠시 숨을 돌리니 차 안에서 기사가 추천해 주었던 족자카르타의 대표 전통 음식 '구덕(Gudeg)'이 퍼뜩 떠올랐다. 구덕은 어린 잭푸르트(Jackfruit)를 팜슈가와 코코넛 밀크, 갖은 향신료와 함께 수시간 동안 푹 조려내는 이 지역 특산 요리다. 구덕으로 가장 유명한 맛집인 '구덕 유줌(Gudeg Yu Djum)'을 찾아갔다. 대기하는 손님이 너무 많아 식당 내 식사는 포기하고 포장해 가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 길거리에서는 숯불 향을 피워 올리며 꼬치를 구워 파는 사태(Satay) 노점도 들러 꼬치구이를 함께 샀다.


숙소로 돌아와 포장해 온 구덕 상자를 열고 사태와 함께 펼쳐놓았다. 닭고기 부위를 주문할 때 '윗살'이라고 하길래 날갯살 부위인 줄 알았는데, 막상 뜯어보니 오동통한 허벅지 살이었다. 코코넛 밀크와 팜슈가에 진하게 조려진 닭고기는 질기지 않고 식감이 아주 쫀득쫀득했다. 마치 한국의 간장 족발 양념에 잘 조려진 닭고기를 먹는 듯한 느낌이었다. 달달하면서도 짭조름한 풍미가 밥반찬으로 절묘하게 어울렸다.

『오늘 진짜 알차게 돌았네.』 노릇하게 구워진 사태 한 꼬치를 베어 물며 스스로에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특별한 계획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인 하루였지만, 거대한 석조 사원들이 전해준 아득한 세월의 무게와 지역 색 짙은 야식 한 상이 족자카르타라는 도시의 매력을 가슴 깊이 각인시켜 주었다. 든든해진 배를 두드리며 내일의 느긋한 카페 일정을 그려보는 족자카르타의 밤이 깊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