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던 첫 하루
새로운 도시를 알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두 발로 직접 걷는 것이다. 가이드북이나 화려한 블로그 포스팅 대신, 구글맵이 인도하는 대로 무작정 길을 따라 나섰다. 자카르타에 도착한 첫날 아침 9시. 섭씨 28도의 맑고 습한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었지만, 낯선 풍경에 대한 설렘으로 가슴이 쿵쾅거렸다. 화려한 빌딩 숲 뒤편으로 연결되는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내가 마주한 첫 장소는 평온하게 자리 잡은 공동묘지였다. 울창한 플루메리아 나무 사이로 고즈넉하게 조성된 묘비들 사이로 조용히 고양이 한 마리가 거닐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아찔하게 높이 솟은 현대식 빌딩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발밑에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평화로운 무덤들이 대비를 이루었다. 삶과 죽음, 그리고 도시의 급격한 발전이 한자리에서 조용히 호흡하고 있었다.

구글맵의 길안내는 관광객을 위한 비단길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카르타 사람들의 진짜 삶의 궤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던 지도 앱의 깊은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묘지를 벗어나자마자 골목길은 급격히 좁아지고 사람들의 날것 그대로의 일상이 펼쳐졌다. 노란 아노락을 입은 배달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지나가고, 그 곁을 손수레에 군것질거리나 생활용품을 실은 상인이 조용히 밀고 갔다. 한 걸음 더 옮기자 동네 주민들이 모아놓은 쓰레기 수거장과 수레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매캐한 오토바이 매연과 좁은 골목 특유의 축축하고 쿰쿰한 냄새가 코끝을 질러왔지만, 도로변에 걸린 붉고 흰 인도네시아 국기들과 사람들의 해맑은 눈빛이 삶의 생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거친 하천과 도로를 지나 만난 뜻밖의 오아시스
40분 가까이 뙤약볕과 매연을 뚫고 묵묵히 걸어가자 뜻밖의 완충지대가 나타났다. 자카르타 남부 골목의 거친 서사를 지나 도착한 도심 공원은 완벽한 안전지대였다. 붉은 보도블록 패턴 위로 늘어진 푸른 나뭇가지들이 만드는 깊은 그늘, 그리고 한가롭게 정원을 가꾸거나 쉬어가는 사람들 덕분에 바짝 긴장했던 마음이 비로소 풀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무 그늘 아래서 더위를 식히며 자카르타라는 도시가 숨겨둔 의외의 정적을 느껴보았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공원을 벗어나자 곧바로 거대한 하천과 차도가 나타났다. 탁한 물빛의 하천 위로는 부유식 쓰레기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었고, 건너편 차도에는 쉴 새 없이 차들과 오토바이가 쾌속으로 달렸다. 인도가 좁아지거나 끊어지는 구간에서는 '길 없는 길'을 본능적으로 찾아 발을 디뎌야 했다. 하천 어느 굽이에서는 하얀 하수 거품이 빙하처럼 거대하게 층을 이루어 둥둥 떠다니는 기이한 풍경까지 마주쳤다. 상공의 거대한 고층 빌딩과 하천의 거품, 오토바이 물결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은 이상하게도 묘한 생동감을 풍기고 있었다.


한 시간 넘게 더위와 매연을 뒤집어쓰고 걷다 보니 한계가 왔다. 살기 위해 근처 대형 쇼핑몰 내부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몸을 감싸는 강력한 에어컨 바람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땀과 길거리 먼지로 찌든 내 모습이 깔끔하게 옷을 입은 현지 쇼핑객들 사이에서 다소 창피하긴 했지만, 지금은 체력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몰 안에 있는 인도네시아 식당에 들어가 한국의 소꼬리탕이나 갈비탕과 흡사한 따뜻한 국물 요리(소또)를 주문했다. 담백한 국물을 그대로 맛보다가 함께 나온 라임을 짜 넣으니 상큼한 감칠맛이 살아났다. 밥 옆에 놓인 바삭한 엠핑 과자를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ChatGPT에 물어보니 '국물에 살짝 적셔 먹거나 삼발 소스를 찍어 먹으라'고 알려주었다. 가르쳐준 대로 국물에 적셔 먹으니 바삭하면서도 쌉싸름한 고소함이 국물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도심의 상징 모나스와 시원한 커피 한 잔의 구원
점심을 먹고 든든해진 기운으로 다시 구글맵을 켰다. 아까 쇼핑몰로 들어오면서 스쳐 지나쳤던 동상이 알고 보니 역사적으로 꽤 중요한 '환영 동상(Selamat Datang Monument)'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던 길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두 팔을 번쩍 들고 도심을 환영하는 동상 사진을 담았다. 1962년 아시안게임을 맞아 자카르타를 찾는 전 세계 손님들을 환영하기 위해 세워진 이 역동적인 동상은 현대적인 빌딩 숲 한가운데에서 도시의 에너지를 뽐내고 있었다.

이어 발걸음을 옮긴 곳은 인도네시아 독립의 상징인 모나스(Monas, 국립기념탑)였다. 멀리서 볼 때도 웅장했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높이 132m에 달하는 대리석 탑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그러나 광장에 들어섰다고 해서 탑 내부로 바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탑 주변 전체가 철제 펜스로 단단히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광장을 한참 헤매다 북쪽 끝으로 가보니 땅굴로 내려가는 작은 부스가 보였다. 지상에서는 바로 진입할 수 없고 지하 터널을 통해서만 표를 사고 탑 내부로 들어가는 독특한 구조였다.

지하 매표소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뙤약볕 아래를 오랫동안 걸어 목이 타들어 갈 듯이 마른 상태였다. 다행히 지하 광장 한쪽에 음료 자판기가 놓여 있어서 반갑게 달려갔다. 하지만 자판기 상단에는 'UANG PAS(딱 맞는 현금만 가능)'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잔돈이 없으면 음료를 뽑을 수 없는 자판기였다. 지갑 속지폐는 큰 단위뿐이었고, 결국 그림의 떡처럼 음료수들을 바라만 봐야 했다. 그렇게 이후 거의 2시간 가까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시련이 시작되었다.



원래 해외 여행을 할 때는 가급적 로컬 카페를 이용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러나 극도로 피로하고 목이 말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올 때는 아는 익숙함에 기대고 싶어진다. 2시간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못한 채 헤매다 마주친 스타벅스는 가뭄 속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아이스 음료를 주문하고 한 모금 깊게 삼키는 순간, 비로소 살 것 같다는 안도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시원한 커피 수혈로 지친 몸과 마음을 차분히 달랬다.

이스티클랄 모스크의 정적과 사람들의 온기
커피로 기운을 차린 후 자카르타의 대표적 종교 건축물인 이스티클랄 모스크(Istiqlal Mosque)로 향했다. 걸어서 도착했기에 거대한 모스크 외곽 담장을 따라 거의 한 바퀴를 크게 돌고서야 비로소 인포메이션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인포메이션 센터로 들어서자 직원들이 반갑게 맞이하며 노출된 반바지를 가릴 수 있는 보라색 긴 옷을 무료로 대여해 주었다. 나아가 모스크 내부를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전담 가이드까지 붙어지어 종교적 장엄함 속에 따뜻한 포용력을 느낄 수 있었다.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스티클랄 모스크의 내부 예배당은 말 그대로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웅장했다. 거대한 중앙 돔을 받치고 있는 12개의 스테인리스 스틸 기둥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탄생일을 뜻하며, 돔의 지름 45m는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언한 1945년을 상징한다고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다. 건물 구조 하나하나에 역사와 종교적 의미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넓디넓은 붉은 카펫 바닥 곳곳에는 많은 이들이 수평으로 누워 있었다. 가이드에게 『저분들은 지금 엎드려 기도하는 중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가이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시원한 모스크 바닥에 누워 한가롭게 자고 있는 겁니다.』 그 대답에 마음이 한결 정겹고 편안해졌다. 종교적 엄숙함에만 갇혀 있지 않고 주민들의 일상적인 휴식처가 되어주는 모습이 무척 다정했다. 2층 회랑으로 올라가니 벽면 너머로 길 건너편에 위치한 자카르타 대성당의 뾰족한 첨탑 두 개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슬람 모스크와 가톨릭 성당이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우호적으로 존재하는 풍경은 종교적 화합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바람을 가르며 돌아가는 길
모스크 투어를 마치고 나오니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하루 종일 만 걸음 넘게 자카르타 도심을 훑으며 걸었던 다리가 묵직해졌다. 호텔로 돌아갈 때는 현지인들의 가장 흔한 이동 수단인 그랩 바이크(Grab Bike)를 호출했다. 초록색 조끼를 입은 기사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타 헬멧을 고쳐 썼다. 시원한 저녁 바람이 얼굴에 부딪히며 낮 동안 맺혔던 땀방울을 깨끗하게 씻어내렸다. 도로를 가득 채운 오토바이 수백 대의 행렬 속에 섞여 달리는 기분은 걸어 다닐 때와는 또 다른 생동감을 선사했다. 오후 6시쯤 다시 호텔에 도착하며 자카르타에서의 첫 하루 여정을 마무리했다. 골목길의 쓰레기장부터 모나스의 웅장함, 모스크의 평화로움까지 숨 가쁘게 걸어 다닌 힘든 하루였지만 마음 깊은 곳은 따뜻한 기억으로 채워졌다. 내가 느낀 자카르타의 첫인상은 '사람들의 순박함과 미소'였다. 길에서 마주친 수많은 그랩 기사나 노점상 중 단 한 명도 억지로 호객하거나 불쾌하게 굴지 않았다. 낯선 이방인을 향해 스스럼없이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어주던 순박한 사람들. 거칠고 소란스럽지만 그 내부에는 시종일관 여행자를 편안하게 품어주는 묘한 온정이 흐르는 도시, 그것이 내가 두 발로 직접 밟으며 알아간 자카르타의 진짜 얼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