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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궁전의 아침과 오래된 골목의 온기

2026.8.9 – 2026.8.10

건기에 접어든 족자카르타의 아침은 뜻밖에 서늘했다. 스마트폰 화면에 찍힌 온도는 21도. 낮의 열기가 밀려들기 전, 낮게 내리앉은 공기가 피부에 닿는 느낌이 참 상쾌했다. 일교차가 큰 이 계절의 오전을 그냥 흘려보내기엔 아까워 부지런히 신발 끈을 매고 밖으로 나섰다.

아침 6시 56분, 21도의 서늘하고 맑은 족자카르타 날씨.

목적지는 왕실의 비밀스러운 휴양지였던 따만 사리(Taman Sari). 대로를 벗어나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담벼락마다 각양각색의 그라피티와 빛바랜 벽돌이 교차하는 좁은 길목은 어딘가 모르게 무해하고 순박해 보였다. 오토바이 한 대 겨우 지날 듯한 이 골목들은 옛날 왕궁 사람들이 다니던 길의 흔적이자, 지금은 주민들의 평온한 삶이 이어지는 터전이다.

따만 사리로 연결되는 담벼락 그라피티와 좁은 골목길.

골목을 요리조리 빠져나오니 마침내 따만 사리를 가리키는 고풍스러운 갈색 표지판이 보였다. 하지만 도착한 시각은 8시 40분. 개장 시간인 9시까지는 약 20분이 남아 있었다. 표지판 옆으로 녹색 헬멧을 쓴 고젝(Gojek) 기사가 한적하게 지나쳐 갔다.

빨갛고 흰 가랜드가 늘어진 평화로운 골목 안풍경.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바로 근처에 위치한 아담한 카페로 들어갔다. 목을 축이려 시원한 차를 한 잔 주문하기로 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차가운 음료를 지칭할 때 '아이스' 대신 '에스(Es)'라는 단어를 주로 쓴다고 들었기에, 나름 자신 있게 지식을 활용해 보았다. 『에스 마차 한 잔 주세요.』 하지만 카운터의 직원분은 나를 배려해서인지 아니면 내 발음 때문인지 미소를 지으며 『아이스 마차?』라고 되물어왔다. 다른 곳에서는 '에스 마차'라는 표현을 잘 알아 들어주었는데, 괜히 억울하기도 하고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어 혼자 속으로 픽 웃음이 터졌다. 쌉싸름하고 달콤한 말차 한 잔을 마시는 사이 마침내 입장 시간이 다가왔다.

따만 사리 입구 안내 표지판과 길목을 지나치는 오토바이.
오픈을 기다리며 주문한 시원한 아이스 말차 한 잔.

18세기 물궁전과 과르디안의 미소

족자카르타는 자바섬 문명의 심장이자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하게 술탄의 왕가 통치권이 유지되는 특별주다. 그중에서도 따만 사리는 1758년 족자카르타 마타람 술탄국의 1대 술탄 하멩쿠부워노 1세가 세운 왕실 정원이다. '향기로운 정원'이라는 뜻처럼, 과거에는 인공 호수와 수영장, 비밀 지하 통로, 그리고 방어용 요새까지 갖춘 궁전 단지였다. 수호신처럼 건물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악귀를 쫓는 '칼라(Kala)' 조각상은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를 가졌는데, 마치 메롱 하고 혀를 내민 듯 쾌활한 표정을 지어 보여 웃음을 자아냈다.

혀를 내밀고 있는 듯 독특하고 위트 있는 벽면 칼라 조각상.

아치형 석조 문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니 한눈에 웅장한 연못과 수영장이 펼쳐졌다. 아침 일찍부터 유적을 찾은 현지 방문객들이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사진을 찍으며 거닐고 있었다. 사방이 두터운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아치문 너머로 비쳐 드는 아침 햇살과 맑은 물빛이 어우러져 오묘하고 고요한 운치를 자아냈다. 세수도 안 한 채 산책하듯 걸어 나온 아침이었지만, 신선한 공기 덕분에 온몸이 신나고 즐거웠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석조 건축물 위 또 다른 칼라 문양 조각.
아치형 문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따만 사리의 중앙 연못과 사람들.

왕실의 시간이 깃든 마차 박물관

물궁전을 나와 근처의 마차 박물관(Museum Kereta Karaton)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족자카르타 시내를 걷다 보면 유독 말을 끌고 다니는 관광 마차 '안동(Andong)'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 역사적 이유를 이 박물관에서 비로소 납득할 수 있었다. 전시관 안에는 과거 술탄 왕가가 의전용 및 거처 이동용으로 사용하던 화려하고 기품 있는 마차들이 빼곡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1900년대 왕실에서 사용하던 클래식한 검은색 마차.
금빛 장식과 정교한 유리창이 돋보이는 웅장한 왕실 의전용 마차.

네덜란드 등 유럽 왕실에서 선물 받거나 수입해 온 마차들은 당대의 기술력과 정교한 미학이 집약된 결정체였다. 1900년대의 벤츠 S클래스나 고급 승합차, 혹은 오픈카에 비견될 법한 위용이었다. 과거 왕실의 중요한 수단이었던 마차 문화가 오늘날까지 도심 곳곳의 마차 풍경으로 연결되어 남아있다는 점이 참 매력적이었다.

붉은 벨벳 시트와 덮개가 장착된 컨버터블 형태의 클래식 마차.

못 가본 지역은 또 다음을 위해 남겨두면 되니 아쉬울 게 없다.

미련 없이 발리로 향하는 발걸음

다음 날 아침, 며칠 전 보로부두르 사원에 갈 때 인연이 닿았던 택시 기사에게 다시 연락해 공항으로 향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자바섬을 가로지르는 육로와 배를 이용해 발리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발리의 풍경을 하루라도 빨리 직접 경험하고 싶었고, 그곳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 과감히 일정을 변경했다.

공항 이동을 위해 며칠 전 택시 기사를 다시 불러 탄 은빛 차량.

지도의 모든 곳을 다 밟아보지 못했다고 해서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거쳐가지 못한 길과 들르지 못한 장소는 훗날 다시 찾아올 여지를 남겨두는 것일 뿐이다.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족자카르타의 푸른 가로수를 바라보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음 섬으로 향했다.

여행 경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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