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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의 섬, 누사페니다

2026.8.24 – 2026.8.25

발리를 떠나 누사페니다 섬으로 향하는 아침, 가방 옆에 짐이 하나 더 늘어났다. 이제부터 시작될 스노클링 일정을 위해 오리발과 마스크 스노클을 새로 샀다. 쓰고 버릴 요량으로 가장 저렴한 녀석들로 골랐지만, 손에 들린 짐 보따리를 보고 있자니 진짜 섬으로 들어간다는 설렘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스노클링 장비가 추가되어 한층 부피가 늘어난 배낭

5개의 엔진이 일으키는 물보라

사누르 항구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랩 기사가 뭐라고 한참 설명을 건넸지만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항구 안쪽까지 들어왔다. 알고 보니 항구로 들어오기 전 선박 회사 사무실에서 먼저 체크인을 하고 티켓을 받아와야 했던 것이다. 결국 3분 남짓한 거리를 다시 걸어서 되돌아갔다. 앞으로는 기사의 말을 조금 더 귀담아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무실에서 붉은색 보딩 패스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맑은 하늘 아래 탁 트인 사누르 항구의 선착장 전경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면 눈치껏 목걸이 색을 확인하며 발걸음을 맞추었다. 항구에서도 길 갈림길마다 안내원들이 목걸이 색을 보고 착착 사람들을 갈라주었다. 목적지가 다들 비슷하니 길을 잘 못 탈 일은 없어 보였다.

선박 탑승을 구분해 주는 붉은색 보딩 패스 목걸이
목걸이 색에 따라 배로 이동하는 승객들의 다리

우리가 탈 배에 다가가니 배 뒤편에 웅장하게 올려진 5개의 엔진이 눈에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게 수면을 질주할 것 같은 믿음직한 수치였다. 엔진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가동되자 쾌속선은 물살을 가르며 푸른 바다 위로 힘차게 달려 나갔다.

뒤편에 5개의 강력한 엔진을 단 쾌속 보트

그랩이 닿지 않는 정글의 섬

누사페니다 항구에 내리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곳은 그랩 서비스가 전혀 닿지 않는 섬이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현지 택시 기사들과 밀고 당기는 협상을 거쳐 차에 올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택시비가 비싸서 살짝 놀랐지만, 차가 출발하고 길을 가보니 곧바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가파른 산길을 끝없이 오르고 내리는 험준한 코스에, 최근 국제 유가 상승까지 더해졌으니 그만한 값을 받는 게 당연하다 싶었다.

누사페니다의 험준한 산길을 달리는 택시 내부

산길을 지나 찾아간 리조트는 울창한 정글 한가운데 둥지를 틀고 있었다. 가격도 부담 없는데다 건물도 깔끔한 새것이었다. 섬 전체가 본격적으로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전해졌다.

울창한 열대 숲속에 아늑하게 늘어선 리조트 방갈로

짐을 내려놓고 정글 같은 리조트 마을을 천천히 걸어 다니니 마음이 절로 상쾌해졌다. 빽빽한 야자수 그늘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스했다.

높은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는 정글 속 오솔길

길가 마당 한쪽에서는 철망 케이지 속에 넣어진 싸움닭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깃털의 색이 화려하고 자세가 늠름한 것이 동네 주민들이 정성껏 키우는 듯했다.

마을 길가 케이지 안에서 늠름한 자태를 자랑하는 싸움닭

해 질 녘 리조트가 몰려 있는 동네로 나갔지만 선택할 수 있는 식당이 많지 않았다. 그중 피자로 유명한 작은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나온 피자 위에는 신선한 바질잎이 풍성하게 올라가 있었다. 바질 향이 코끝을 알싸하게 감쌌다. 이 동네 음식들은 화려한 테크닉을 떠나서 재료 하나하나가 어찌나 신선한지 입안 가득 건강한 풍미가 전해졌다.

신선한 바질과 치즈가 듬뿍 올라간 담백한 화덕 피자

걷는 여행자가 만난 고요한 오솔길

다음 날 아침, 기대했던 만타레이 투어를 포기해야 했다. 심한 배탈이 나는 바람에 물속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누워만 있기엔 아까워 운동화를 갈아신었다. 나는 본래 걷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다. 크리스탈 베이 뒷산을 가로질러 엔젤 빌라봉까지 걸어가는 트레킹 코스를 잡았다.

트레킹 시작점, 호젓하게 뻗은 크리스탈 베이 뒷산 숲길

처음 87미터 정도 고도를 높이고 나자 눈앞에 순하고 평탄한 흙길이 펼쳐졌다. 풀벌레 소리만 가득한 숲길을 얼마간 걷다 보니 나뭇가지 그늘 아래 서 있는 갈색 소 한 마리와 마주쳤다. 인적이 드문 길에서 만난 뜻밖의 순박한 존재가 참 반가웠다.

산길 그늘 아래에서 한가롭게 이방인을 바라보는 소

정상 근처에 다다르자 고요했던 오솔길 끝으로 작고 정겨운 시골 마을이 나타났다. 전체 코스의 절반쯤 온 셈이었다.

산 정상 부근에서 만난 빨간 지붕의 아담한 첫 마을
마을을 지나 나타난 뙤약볕 내리쬐는 매끄러운 포장도로

마을을 지나자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길게 이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아늑한 산길을 더 좋아하는 터라 땡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도로를 마주했을 땐 약간 속상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자 도로 저 너머로 아득하고 푸른 바다가 얼굴을 내밀었다.

도로 언덕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시원한 푸른 바다

거친 절벽 끝에 피어난 천사의 웅덩이

목적지 입구에 도착하니 그늘이 드리워진 아담한 쉼터가 있었다. 여기서 야자수 한 통을 주문해 갓 쪼갠 시원한 코코넛 즙을 마시며 드론을 날렸다. 혼자 하는 여행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내가 멈추고 싶을 때 언제든 멈출 수 있어 좋다. 타인과의 합의나 타협이 없는 완전한 자유에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만큼 외로움에도 바짝 다가서게 되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그 중간 어디쯤에서 균형을 맞추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느낀다.

절벽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입구 쉼터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탁 트인 인도양의 짙푸른 바다

드디어 엔젤 빌라봉에 발을 디뎠다. 이것을 직접 눈에 담기 위해 그 뙤약볕을 뚫고 걸어온 것이다. 사실 걷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편이라 과정만 아름다워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오늘은 그 결과까지 상상 이상으로 완벽했다. 거대한 절벽이 천연 아치처럼 바다를 안고 있는 풍경은 숨이 턱 막힐 만큼 압도적이었다.

자연이 만든 거대한 바위 아치와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 브로큰 비치

다시 숲으로, 길 위에 떨어진 붉은 흔적

돌아가는 길에는 오토바이 택시를 집어탈 생각이었지만, 다들 단체 차량을 타고 들어와 손님이 없는 빈 택시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내 몸에 먼저 연료를 공급하기로 했다. 근처 식당에 들어가 부리또를 청했으나 재료가 없다 하여 퀘사디아를 주문했다. 정작 테이블에 올라온 것은 동그랗게 말린 부리또 모양의 퀘사디아였다. 약간 웃음이 났지만, 맛을 보니 바삭하고 고소한 진짜 퀘사디아가 맞아서 맛있게 그릇을 비웠다.

부리또 모양으로 노릇하게 말려 나온 고소한 퀘사디아

차들이 지나다니며 열기를 뿜어내는 아스팔트 도로를 벗어나 다시 그늘진 숲길로 접어들었다. 차 소리가 멀어지고 다시 풀벌레와 바람 소리가 다가왔다.

뙤약볕 도로를 벗어나 다시 들어선 고요한 숲 오솔길

한참을 걷다 보니 바닥에 붉은 꽃잎들이 비단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자연이 능숙하게 깔아둔 붉은 꽃길을 밟으며 걷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흙길 위에 레드 카펫처럼 점점이 떨어진 붉은 꽃잎들

드디어 숙소가 있는 우리 동네 초입에 들어섰다. 큼직한 야자수 그늘 아래 뻗은 흙길을 보니 집이라도 다 온 듯 반가웠다.

숙소가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는 친숙한 동네 입구 길

마침내 숙소 방갈로 앞에 무사히 도착했다. 크리스탈 베이 지역에서 엔젤 빌라봉까지 차를 타지 않고 오롯이 걸어서 다녀온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요즈음 같은 때엔 아마 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도로가 사방으로 뚫리기 전 수십 년 동안은 내가 오늘 거닌 이 숲길이 섬 사람들의 메인 도로였을 것이다. 혹시 나처럼 걷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코스를 기꺼이 추천하고 싶다. 위험한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선한 미소처럼 악의 없는 길이다. 다만 해가 머리 꼭대기에 뜨기 전 아침 일찍 출발하는 편이 훨씬 완벽할 것이다.

트레킹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온 아늑한 리조트 정원
여행 경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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