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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 소리 없는 섬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일하는 시간

2026.8.26 – 2026.8.31

인도네시아 여행의 마지막 여정으로 길리 3개 섬 중 가장 조용하고 스노클링을 즐기기 좋은 길리에어(Gili Air)를 선택했다. 여행의 마침표를 찍는 공간이자 집중해서 일도 하고 깊은 휴식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굽이진 산길을 뚫고 선착장으로 향하는 차 안,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전면 유리 너머의 길을 바라보며 마음에 은근한 설렘이 피어올랐다.

선착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바라본 산길 풍경

선착장에 도착하자 투명하다 못해 속이 훤히 비치는 옥빛 바다 위에 커다란 보트가 차분하게 떠 있었다. 보트에 오르기 직전의 순간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만든다. 이 보트에서 내렸을 때는 내가 아직 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고,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낯선 땅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투명한 바다 위에 부두와 함께 떠 있는 보트

배가 물살을 가르고 길리에어에 상륙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마차들이었다. 족자카르타에서 보았던 것과 닮은 마차들이 줄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길리에어는 매연을 내뿜는 엔진 탈것이 금지되어 있는 섬이다. 그래서 이곳의 이동 수단은 오직 자전거와 전기 스쿠터, 그리고 본인의 두 발뿐이다. 딸깍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바람 소리가 섬의 첫인상을 채웠다.

엔진 탈것 대신 손님을 기다리는 길리에어의 마차들

섬 안쪽에 위치한 숙소로 이동했다. 1박에 12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예약한 풀빌라인데, 조식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프라이빗 수영장이 펼쳐진 이 아늑한 공간에서 5박 동안 머무를 예정이다. 여기서 일도 하고, 원 없이 수영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을 피우며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잔잔한 전용 수영장이 갖춰진 아늑한 풀빌라 숙소

생각보다 섬에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짐만 대충 내려놓고 곧바로 식사할 곳을 찾아 나왔다. 갈비탕처럼 따뜻하고 깊은 맛이 나는 스프와 계란후라이가 얹어진 나시고랭을 주문했다. 돌아보니 이것이 오늘 하루 동안 먹은 첫 끼니였다. 따뜻한 국물과 음식이 들어가는 순간, 온몸의 세포 마다 온기가 퍼져나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갈비탕을 닮은 스프와 고소한 나시고랭으로 즐긴 첫 끼니

바다를 품은 일터, 디지털 노마드의 일상

다음 날 아침, 메신저로 조식을 요청하자 직원이 풀빌라 테이블로 정성스러운 아침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싱싱한 열대 과일과 노릇하게 구운 토스트, 수박주스, 커피가 차려졌다. 풀빌라에서 작업하는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오랫동안 바랐던 로망이었는데, 이렇게 너무 쉽게 이루어버리니 괜히 살짝 죄책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노트북 옆으로 달콤한 과일과 토스트가 차려진 풀빌라 조식

식사를 마친 뒤 가볍게 마을 산책에 나섰다. 길리에어는 아담하고 정겨운 시골 마을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길가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다 그늘 밑 파이프 위에 사이좋게 꼭 붙어 앉아 있는 닭 두 마리를 만났다. 소소하지만 평화로운 일상의 한 장면이었다.

길가 그늘 아래 파이프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닭들

섬에는 고양이들도 참 많다. 분홍빛 프렌지파니 꽃이 피어난 나무 위를 올려다보니, 나뭇가지 사이에 자리를 잡고 누워 내려다보는 고양이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길리에어는 무언가를 바쁘게 하지 않아도, 그저 이런 풍경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쉬어가기에 더없이 좋은 섬이다.

분홍 꽃이 핀 나뭇가지 위에서 편안하게 내려다보는 고양이

점심으로는 'Curry Corner Gili Air'라는 작은 식당을 찾았다. 이곳은 음식 맛이 정말 뛰어나서 섬에 머무는 동안 무려 세 번이나 방문했다. 진한 커리와 바삭한 크루푹, 따뜻한 밥이 어우러진 모든 메뉴가 감탄을 자아냈다. 식사 시간이 되면 늘 손님들로 만원이 되는 이유를 단번에 납득할 수 있었다.

진한 커리와 밥, 바삭한 크루푹이 함께 나오는 커리 코너의 요리

점심을 먹고 해변가에 위치한 공유오피스로 이동했다. 창문 너머로 시원하게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와 건너편 롬복의 푸른 산맥을 바라보며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았다. 바다를 배경 삼아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산이 내다보이는 공유 오피스에서의 작업 공간

일을 마치고 해변 길을 걸어가는데 바람에 달그락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둘러보니 나무 조각과 조개껍데기, 소라 껍데기를 실로 꿰어 만든 아기자기한 이정표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앙증맞은 풍경이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바람에 조개껍데기가 달그락거리는 해변가의 감성적인 나무 이정표

노을 빛의 여운과 섬의 풍성한 맛

길리에어의 일몰은 유독 아름답다. 매일 해 질 녘이 되면 홀린 듯 서쪽 해변을 찾았다. 수평선 너머로 붉은 태양이 천천히 몸을 감추며 바다와 하늘을 온통 황금빛과 붉은빛으로 물들여갔다.

서쪽 수평선 너머로 붉게 물들며 넘어가는 일몰

해가 완전히 몸을 감추고 난 후에도 해변을 떠날 수 없었다. 하늘에 남겨진 노을빛 여운과 저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산의 실루엣이 장관을 이루었다. 그 오묘한 색조의 바다 위에 서서 잔잔하게 밀려드는 파도를 느끼는 순간은 긴 여운을 남겼다.

해가 진 후 하늘과 바다에 남아있는 오묘하고 아름다운 붉은 여운

저녁을 먹으러 길을 걷다 한 레스토랑 앞에서 신선한 소고기를 냉장고에 깔끔하게 전시해 둔 광경을 보았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들어가 숯불 향이 그윽하게 배어난 두툼한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부드럽고 풍부한 육즙이 입안 가득 퍼지며 하루의 피로를 깔끔하게 씻어주었다.

숯불 위에서 그윽하게 구워낸 근사한 소고기 스테이크

다음 날 저녁에는 해변가의 생선구이 집을 찾았다. 얼음 위에 진열된 신선한 생선들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면 직원이 그 자리에서 즉시 석쇠에 올려 구워주는 시스템이었다.

손님이 선택한 신선한 생선을 들어 보여주는 직원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생선이 바나나 잎 위에 올려져 나왔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생선살에서 고소한 향이 진동했다. 라임과 삼발 소스를 곁들여 따뜻한 밥과 함께 먹으니 그 고소함이 일품이었다.

바나나 잎에 받쳐 나온 노릇하고 고소한 생선구이 상차림

바다거북과의 만남,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섬이 작다 보니 아침에 동쪽으로 걸어가면 일출을 맞이할 수 있고, 해질녘 서쪽으로 걸어가면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맑은 아침 공기를 마시며 동쪽 해변으로 나가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일출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았다.

동쪽 해변 나무 그늘 너머로 차분하게 떠오르는 아침 일출

길리에어는 바다거북을 만날 수 있는 스노클링으로 매우 유명하다. 해변에서 불과 30~50미터만 들어가도 화려한 산호 군락지가 펼쳐지는데, 조용히 주변을 살피며 기다리다 보니 커다란 바다거북이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옆으로는 좀처럼 측면을 보여주지 않고 도도하게 헤엄쳐 지나가는 독특한 물고기도 만났다.

산호 군락 위를 유유히 헤엄치는 거대한 바다거북
맑은 바닷속 산호초 사이를 우아하게 유영하는 독특한 물고기

떠나는 날 아침, 항구 근처를 천천히 걸었다. 맑고 투명한 바다 위에 여러 색상의 보트들이 떠 있는 항구 풍경마저도 너무나 예뻤다. 길리에어는 그저 사색하며 걷다가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기만 해도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섬이었다. 활기찬 메인 거리를 지나 다시 보트가 기다리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정겨운 배들이 떠 있는 길리에어 항구
다이버들과 스쿠터로 활기 넘치는 길리에어의 메인 거리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육지로 향하는 보트에 몸을 싣는다. 돌아갈 일상이 있기에 지금 느낀 이 특별함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충만해진 마음을 안고 집으로 가자!!

다시 육지로 돌아가는 보트에 오르기 위해 걸어가는 발걸음
여행 경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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