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 풍경을 따라 흐르는 길, 족자카르타로 향하는 기차
자카르타의 번화하고 무더운 아침 공기를 뚫고 감비르(Gambir) 역에 들어섰다. 오늘 여정은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문화 중심지인 족자카르타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코스다. 일찍부터 역 전면 홀 앞에는 여행 가방을 끌고 오가는 사람들과 세단 차들이 쉼 없이 번잡하게 스쳐 지나갔다.

감비르 역의 아침과 럭셔리 라운지
이번 여행을 위해 럭셔리 티켓을 미리 예매해 두었던 덕분에 전용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시원하고 쾌적한 에어컨 바람이 반겨주었고, 소파와Marble 테이블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다채로운 음료와 먹거리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하필 아침부터 배탈이 난 상태라 그림의 떡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시원한 공기 속에 몸을 녹이며 출발 시각을 기다렸다.

탑승 시각이 다가와 안내 방송을 들으며 승강장으로 향했다. 4번 승강장의 디지털 전광판에는 열차 정보가 명확히 찌찍히고 있었고, 플랫폼 의자마다 수많은 탑승객이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대기 중이었다. 내 코치는 맨 뒷칸에 위치해 있어서 직원의 안내를 물어물어 걸어갔다. 붉은 유니폼을 입은 포터들이 커다란 짐 가방을 어깨에 메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맨 뒷칸 럭셔리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직한 전동 리클라이닝 좌석이 눈앞에 펼쳐졌다. 좌석 앞간격이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다리를 끝까지 뻗어도 앞자리에 닿지 않을 정도였다. 개인용 쿠션과 담요, 생수 한 병이 깔끔하게 구비되어 있었고, 객실 내부 분위기 또한 조용하고 고급스러워 기차 여행의 기대감이 한층 부풀어 올랐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영상과 달콤 짭조름한 기내식
기차가 미끄러지듯 감비르 역을 떠나며 부드럽게 속도를 올렸다. 나는 기차 여행이 참 좋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싱그러운 초록빛 농촌 풍경과 작은 마을들이 마치 끊이지 않는 여행 다큐멘터리 영상처럼 계속해서 지나간다. 요즘 기차는 시설도 훌륭하고 매우 쾌적하기까지 해서 창가에 기대어 풍경을 관람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없이 평온해졌다.

점심시간이 되자 승무원이 정성스럽게 포장된 도시락 상자를 전달해주었다. 상자를 열자 바나나 잎에 정갈하게 싸인 뭉치가 보여서 내심 양념이 가득 베인 특별한 요리가 들어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바나나 잎을 펼쳐보니 그냥 하얀 쌀밥이 나와서 처음엔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함께 곁들여 나온 바삭한 감자 칩과 매콤하게 양념된 반찬을 곁들여 먹어보니 고소하면서도 감칠맛이 일품이었다. 처음에 살짝 섭섭했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밥 한 그릇을 깔끔하게 비워냈다.

미로 같은 골목 끝에 자리한 안식처
약 6시간여를 달려 마침내 오후 3시 정각, 족자카르타 역(Stasiun Yogyakarta)에 무사히 도착했다. 역 광장으로 나오니 노란색 고풍스러운 옛 증기기관차 모형과 붉은 플래카드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이제 예약해둔 호텔을 찾아 이동할 차례다.

지도 앱을 보며 숙소를 찾아가는 길에 커다란 노란색 표지판이 걸린 작고 좁은 골목을 만났다. 표지판에는 'HARAP TURUN DARI KENDARAAN' 즉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진입하지 말고 내려서 끌고 가라는 경고문과 진입금지 표시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지레 겁을 먹고 들어가도 되나 한참을 해맸는데, 막상 발을 들여놓으니 아기자기한 여행자 거리의 아늑한 향수가 물씬 풍기는 정겨운 골목길이었다.


골목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마침내 예약해둔 파트라 말리오보로(Patra Malioboro) 호텔의 웅장한 흰색 기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씨가 건기라 땡볕 아래서도 땀이 크게 나지 않아 깔끔한 상태로 체크인을 마칠 수 있었다. 방에 짐을 풀고 나니 시원한 무언가를 먹으러 나갈 생각에 절로 가슴이 설렜다.

말리오보로의 마차 소리와 소박한 한 끼
가벼운 차림으로 나와 호텔 근처 거리인 말리오보로 일대를 거닐었다. 이 지역은 특이하게도 클래식한 마차가 마치 일반 대중교통처럼 도로 위를 당연하다는 듯 다녔다. 말이 끌고 가는데도 바닥에 말똥 하나 없이 도로가 아주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는 점이 참 신기하고 매력적이었다.

구글 지도에서 미리 검색해둔 평점 좋은 볶음 라면 집으로 향했다. 시장이 반찬이기도 했지만, 바삭하게 튀겨진 만두피 고명과 야채, 간장 양념이 어우러진 면발이 입에 착착 감겼다. 인도네시아 음식은 어디서 무얼 시켜도 기본 이상 평균 이상의 훌륭한 맛을 내는 것 같다. 시원한 차 한 잔을 곁들이며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겼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근처 편의점에 들러 아기자기한 캔 음료 하나를 샀다. Nestlé Bear Brand 캔인데 통통하고 자그마한 디자인이 유독 귀여워 한참을 바라보다 골랐다. 마셔보니 달콤하고 부드러운 전형적인 밀크티 맛이었다.

서늘한 건기 밤바람과 말리오보로의 야경
오후 7시 무렵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인도네시아의 건기 시즌이라 그런지 낮 동안의 열기는 씻은 듯 사라지고 해가 진 후에는 걷기에 딱 좋은 서늘하고 쾌적한 날씨로 변해 있었다.

여행자 거리의 끝자락까지 산책하듯 걸어갔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의 시작점일 수도, 나에게는 끝자락일 수도 있는 그곳에는 'JOGJA KOTA BATIK DUNIA(세계 바틱의 도시 족자카르타)'라는 강렬한 붉은색 조형물이 야경 속에서 웅장하게 빛나고 있었다.

호텔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리다가 분홍빛 네온사인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한 매장을 발견했다. 유리문에는 한글로 『라면은 사랑입니다』라는 문구가 세로로 적혀 있었는데, 읽는 순서가 어색해서 글씨를 읽기 전에 순간 머뭇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지에서 만난 한글 네온사인이 소소한 웃음을 안겨주었다.

여정을 마치며 — 쾌적했던 기차 여행의 잔상
하루 일정을 마치고 조용한 호텔 방에 돌아와 길었던 오늘을 가만히 반추해본다. 자카르타에서 출발해 족자카르타까지 이어진 이동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쾌적하고 편안한 기차 여정이었다. 넓고 안락했던 럭셔리 객실의 의자, 창문 너머로 수놓아지던 인도네시아의 푸른 전원 풍경, 그리고 소소하지만 맛깔스러웠던 기내식 도시락까지. 비행기의 빠름 대신 택했던 기차의 더딘 속도가 오히려 여행자로서 누릴 수 있는 여유와 운치를 더 깊게 만들어 준 듯하다. 쾌적했던 기차 여행의 여운은 족자카르타 밤거리의 밤바람과 함께 오래도록 가슴속에 머물 것 같다.
